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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은 우리가 즉각 알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마음이라고 하면 우리는 다시 혼란에 빠진다.
의식은 즉각 인지가 가능한데 또다시 어떤 것을 마음이라 해야할지 난감해 한다.
이 말은 죽음과 그 이후를 이해하는 중요한 포인 트가 된다.
마음은 의식이 가능하도록 하는 바탕이다.
마치 컴퓨터로 치면 하드웨어와 프로그램 같은 것이다. 소프트웨어인 프로그램은 하드웨어 없이 만들어질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 삶에서 ( 의식에서 ) 하드웨어의 존재는 늘 잊혀져왔다. 사실 굳이 떠올리며 살아야할 이유가 별로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근본문제 를 도외시하고 사는 것이다.
그러나 게중에는 이 근본문제를 관심있어 하는 부류가 있다.
대개 죽음에 가까와져서 삶 전체를 돌이켜 보는 시간이 되면 이 삶을 너머 무엇이 있는지 비로소 정말로 알고싶어 한다.
그렇지만 이 문제는 간단히 알게되지는 않는다. 의식으로 의식 이전을 알려는 시도는 판판이 실패하거나 엉뚱한 종교적 설정으로 흐른다.
절반은 종교에 귀의하고 절반은 골치아픈 문제랑 잊고 다시 세상의 가치와 쾌락으로 복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근본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이유는 실은 따로 없다.
각자 100 % 행복해 지기를 바라는 에너지의 방향성이 이 일을 지속하게 한다. 사람들은 근사한 말로 영혼의 갈증이니 전생의 염원 이라고 말하지만 모두 지어낸 말이다.
그저 그놈( 하드웨어 )이 그렇게 이어 나아가는 것 뿐이다.
소프트웨어란 원래 하드웨어에 구비되어 있는 연산을 얽어놓은 것이다. 하드웨어란 소프트웨어로 해석하지 못하는 영역이다.
우리의식은 그래서 이 마음을 불가사의 하게 본다. 삼라만상을 만들고 지우고 또 드러내는, 거대하다면 이 이상 거대할 수 없고, 정밀하기로 말하면 우리가 짐작한 것을 모두 뛰어 넘는다.
부처 님도 그 모두를 말할 수는 없고 단지 숲속에서 나뭇닢 하나를 알았는 정도라 했다.
어쨌든 이 하드웨어는 연산 /작용이 있는 場이다. 마음에서의 연산작용은 연기(緣起)이다. 하드웨어에 무궁무진한 프로그램이 가능하듯이 마음은 연기하여 만물을 나둔다.
프로그램이 하드웨어 위에 아무런 형체가 없듯이 만상도 마음위에 일체 형상이 없다. 정말 기가막힌다.
부처님은 반야경에 사거리에 나아가 수많은 대중을 교화하였다 해도 한 중생도 건져올린 바 없다고 설법하였다.
사람만 없는게 아니라 일체 만물이 그러하다.
다시 삶과 죽음의 문제로 다시 돌아가 보자.
우리의 삶 자체가 연기적 으로 피어났다 사라진다, 아무런 흔적도 없이 존재하는 이 마음위에.
흔적도 없는 이 마음이 실로 체감되지 않기에 사람들은 모양에 집착한다.
이 마음이 실감되며는 사람들은 더 이상 모습에 얽매이지 않을 것이다.
이 마음을 실감하는 일이 깨달음이고 성품을 본다는 의미 에서 견성(見性)이라고 한다.
의식은 즉각 인지가 가능한데 또다시 어떤 것을 마음이라 해야할지 난감해 한다.
이 말은 죽음과 그 이후를 이해하는 중요한 포인 트가 된다.
마음은 의식이 가능하도록 하는 바탕이다.
마치 컴퓨터로 치면 하드웨어와 프로그램 같은 것이다. 소프트웨어인 프로그램은 하드웨어 없이 만들어질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 삶에서 ( 의식에서 ) 하드웨어의 존재는 늘 잊혀져왔다. 사실 굳이 떠올리며 살아야할 이유가 별로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근본문제 를 도외시하고 사는 것이다.
그러나 게중에는 이 근본문제를 관심있어 하는 부류가 있다.
대개 죽음에 가까와져서 삶 전체를 돌이켜 보는 시간이 되면 이 삶을 너머 무엇이 있는지 비로소 정말로 알고싶어 한다.
그렇지만 이 문제는 간단히 알게되지는 않는다. 의식으로 의식 이전을 알려는 시도는 판판이 실패하거나 엉뚱한 종교적 설정으로 흐른다.
절반은 종교에 귀의하고 절반은 골치아픈 문제랑 잊고 다시 세상의 가치와 쾌락으로 복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근본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이유는 실은 따로 없다.
각자 100 % 행복해 지기를 바라는 에너지의 방향성이 이 일을 지속하게 한다. 사람들은 근사한 말로 영혼의 갈증이니 전생의 염원 이라고 말하지만 모두 지어낸 말이다.
그저 그놈( 하드웨어 )이 그렇게 이어 나아가는 것 뿐이다.
소프트웨어란 원래 하드웨어에 구비되어 있는 연산을 얽어놓은 것이다. 하드웨어란 소프트웨어로 해석하지 못하는 영역이다.
우리의식은 그래서 이 마음을 불가사의 하게 본다. 삼라만상을 만들고 지우고 또 드러내는, 거대하다면 이 이상 거대할 수 없고, 정밀하기로 말하면 우리가 짐작한 것을 모두 뛰어 넘는다.
부처 님도 그 모두를 말할 수는 없고 단지 숲속에서 나뭇닢 하나를 알았는 정도라 했다.
어쨌든 이 하드웨어는 연산 /작용이 있는 場이다. 마음에서의 연산작용은 연기(緣起)이다. 하드웨어에 무궁무진한 프로그램이 가능하듯이 마음은 연기하여 만물을 나둔다.
프로그램이 하드웨어 위에 아무런 형체가 없듯이 만상도 마음위에 일체 형상이 없다. 정말 기가막힌다.
부처님은 반야경에 사거리에 나아가 수많은 대중을 교화하였다 해도 한 중생도 건져올린 바 없다고 설법하였다.
사람만 없는게 아니라 일체 만물이 그러하다.
다시 삶과 죽음의 문제로 다시 돌아가 보자.
우리의 삶 자체가 연기적 으로 피어났다 사라진다, 아무런 흔적도 없이 존재하는 이 마음위에.
흔적도 없는 이 마음이 실로 체감되지 않기에 사람들은 모양에 집착한다.
이 마음이 실감되며는 사람들은 더 이상 모습에 얽매이지 않을 것이다.
이 마음을 실감하는 일이 깨달음이고 성품을 본다는 의미 에서 견성(見性)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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