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가 있다. 소리도 맛도 냄새도 없다.
어느 기기에 흘러 들어가면 바람을 일으키기도, 열을 내기도 하고 심지어 컴퓨터라는 기기에 들어가면 온갖 계산이며 영상을 보여 주기도 한다.
마음이란 마치 전기 같다. 찾을래야 찾을 수 없고 볼래야 볼 수 없다.
그렇지만 마음은 땅도 만들고 하늘도 만들어 수천 수만 '생명'이라 불리는 기기들을 만들고 작동 까지 한다.
크게는 마음이라는 이 하나가 유일한 생명이지만 우리는 그 고향을 깜빡 잊고 자기를 포함한 온갖 것들을 생명이라 불러 소중히 간직한다.
그것 역시 어찌 생명이 아닐까 마는 그 작은 생명에만 집착하고 크고 유일한 생명인 마음을 모르면 늘 생사의 늪에서 불안한 나날을 보낼 수 밖에 없다.
그 작은 생명이라는 것은 모두 늘 인연이 가합하여 있는 듯하다가 그것이 흩어지면 사라져 흔적도 없다.
자기를 가만히 들여다 보면 이것 역시 여러 가지 원인과 조건에 맞춰 현존하는 무엇일 뿐 결정적으로 무엇이라 할 게 없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지금의 '나'이기 이전에 그 무엇이다.
도자기이기 이전에 흙이고, 아이스크림이 되기 전엔 물과 설탕이었다. 모든 것은 그것이기 전에 그것의 질료이었다.
흙이나 물 설탕 또한 그것 이전에 질료인 분자와 원자이다. 분자나 원자 또한 그 이전의 질료이다.
그 모든 것의 질료는 또 무엇이었을까? 곰곰히 생각해보자......
우선 모양이 있다면 아직 그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없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 그것에 기반한 삼라만상이 분명히 있다.
전기가 안 보인다고 전기를 부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 보이지도 않는 것을 보는 것은 눈으로는 아얘 불가능하다. 마치 컴퓨터 카메라로 전기를 잡아내려는 것과 같이 불가능 하다.
그 어떤 개체의 시도는 불가능하지만 모든 개체는 동시에 질료이기 때문에 스스로 질료임을 확인하는 순간 스스로를 볼 수 있다.
이는 마치 눈이 눈을 보는 것과 같다. 육안으로는 불가능하지만 마음이 마음을 보는 것은 언제나 가능하다. 컴퓨터가 전기를 볼수는 없지만 전기는 스스로를 알 수 있다.
이때의 앎은 개체의 의식이 행하는 앎과 그 차원이 다른 앎이다.
이 앎은 모든 삼라만상이 일미(一味)라는 앎이며 개념이나 의식 이전의 앎으로 불교에서는 이를 '견성'이라고 부른다.
이 앎은 모든 존재의 귀결점으로 작은 개체로서의 끝모를 불안감이 비로소 종식되는 곳으로 해탈지견이 나오는 바로 그 곳이다.